‘사람이 문제가 아니다, 문제가 문제다’: 이야기치료의 외재화와 재저작

‘사람이 문제가 아니다, 문제가 문제다’: 이야기치료의 외재화와 재저작

호주의 Michael White와 뉴질랜드의 David Epston은 1990년 *Narrative Means to Therapeutic Ends*에서 ‘사람이 문제가 아니라, 문제가 문제다’라는 한 줄로 심리치료의 전제를 바꿨습니다. Foucault의 권력·담론론과 Bruner의 이야기 심리학을 임상에 끌어들인 이야기치료는, 사람과 문제를 언어로 분리(외재화)하고 ‘반짝이는 순간’을 모아 새 이야기를 짓습니다(재저작). 한국에는 고미영 교수가 2004년 *이야기치료의 이해와 적용*으로 본격 소개했습니다.

한눈에 보기

이야기치료(White·Epston 1990)는 ‘외재화(불안이 너에게 무엇을 시켰는가)’로 사람-문제를 분리하고, ‘반짝이는 순간(unique outcomes)’을 찾아 ‘재저작’합니다. RCT 근거는 CBT보다 적지만(Vromans·Schweitzer 2011 우울·외상 예비 지지), 가족치료·원주민/이주민 심리지원에서 광범위 채택. 한국 도입은 고미영 2004.

‘너의 우울’이 아니라 ‘그 우울’

1980년대 호주 애들레이드의 가족치료사 Michael White(1948–2008)는 한 가지 어색한 어법을 시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너의 우울’ 대신 ‘그 우울’, ‘너의 불안’ 대신 ‘그 불안’. 그는 뉴질랜드 오클랜드의 David Epston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이 어법을 다듬었고, 1990년 두 사람은 Narrative Means to Therapeutic Ends(W.W. Norton)를 출간했습니다. 책의 한 문장은 그 후 한 세대의 치료사들을 흔들었습니다 — ‘사람이 문제가 아니다, 문제가 문제다(The person is not the problem; the problem is the problem).’

그때까지 정신의학·심리학은 ‘우울증 환자’ ‘경계성 인격장애자’ ‘ADHD 아동’ 같은 진단명으로 사람을 묶었습니다. White와 Epston은 이 묶음 자체가 사람을 작아지게 만든다고 봤습니다. ‘문제는 문제일 뿐, 너는 그보다 훨씬 크다’ — 그래서 이야기치료(Narrative Therapy)의 첫 동작은 **언어로 사람과 문제를 떼어내는 일(외재화, externalization)**입니다.

후기구조주의 가족치료의 탄생

이야기치료는 갑자기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 뿌리는 세 줄기입니다.

첫째, Michel Foucault의 권력·담론 분석. White는 만년에 거의 매년 Foucault를 다시 읽었다고 회고했습니다.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는 의학적 시선이 어떻게 사람을 ‘환자’로 만드는가 — 이 비판이 진단 라벨에 의문을 던지는 외재화의 사상적 기둥입니다.

둘째, Jerome Bruner의 이야기 심리학. 인간은 통계가 아니라 이야기로 자기를 이해한다는 통찰. Acts of Meaning(1990)은 이야기치료와 같은 해에 출간돼 서로를 정당화했습니다.

셋째, 사회구성주의와 Derrida의 해체. ‘성공한 직장인’ ‘좋은 엄마’ 같은 지배 서사(dominant story)가 한 개인의 현실을 어떻게 식민화하는지 — 이야기치료는 이 서사를 ‘해체’하고 ‘얇은 묘사(thin description)’를 ‘두꺼운 묘사(thick description)’로 바꾸려 합니다(인류학자 Clifford Geertz의 개념 차용).

호주 애들레이드의 Dulwich Centre는 White가 1983년 공동 설립한 거점이 됐고, 지금까지 이야기치료 훈련·출판·원주민 가족 지원 사업을 이어옵니다.

외재화 — 언어를 바꾸면 관계가 바뀐다

외재화는 단순한 어법이 아닙니다. 치료사는 내담자에게 ‘문제에 이름을 붙여 보자’고 제안합니다. ‘그 우울’도 좋고, 더 구체적으로 ‘회색 안개’ ‘납덩이’ ‘재촉하는 목소리’도 좋습니다. White는 이를 **‘문제가 스스로 이름을 짓도록 하기(letting the problem name itself)’**라 불렀습니다.

이름이 붙으면 질문이 달라집니다.

  • ‘너는 왜 자꾸 무기력하니?’ → ‘그 회색 안개는 언제부터 너를 따라다녔니?’
  • ‘너는 왜 화를 못 참니?’ → ‘그 화르륵은 어떤 상황에서 너에게 가장 큰 힘을 쓰니?’
  • ‘너는 왜 폭식하니?’ → ‘그 폭식이 너에게 무엇을 시키고, 무엇을 약속하니?’

언어가 바뀌면 두 가지가 일어납니다. ① 내담자는 자기를 ‘문제 그 자체’가 아니라 ‘문제와 관계 맺고 있는 사람’으로 보게 됩니다. ② 가족·친구는 ‘문제 있는 그 애’가 아니라 ‘함께 그 문제와 싸우는 우리’가 됩니다. 외재화는 수치심을 분해합니다.

다섯 가지 핵심 실천

이야기치료의 한 회기는 보통 다음 다섯 단계가 유연하게 섞입니다.

실천 목적 예시 질문(한국어) 결과
외재화(Externalization) 사람-문제 분리 그 불안에 이름을 붙인다면?’ 수치심·자기비난 감소
문제의 영향 지도(Mapping the influence of the problem) 문제가 어떤 영역을 얼마나 차지하는지 ‘그 불안이 너의 잠·관계·일에 무엇을 했니?’ 문제 범위 가시화
사람의 영향 지도(Mapping the influence of the person) 문제에 맞선 자기 행위 발견 ‘그 불안이 약해진 순간이 한 번이라도 있었니?’ 반짝이는 순간(unique outcomes) 발굴
반짝이는 순간(Unique outcomes) 지배 서사의 예외 수집 ‘그날 너는 어떻게 그렇게 했니?’ 대안 서사의 재료 확보
재저작(Re-authoring) 대안 이야기로 자기 재구성 ‘이 순간들이 너에 대해 무엇을 말해 주니?’ 두꺼운 묘사·정체성 회복

‘반짝이는 순간’은 핵심 개념입니다. 우울이 6개월째인 사람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지난 화요일 오후, 친구 전화에 웃었던 7분’이 있습니다. 지배 서사(‘나는 늘 우울하다’)는 그 7분을 ‘예외’로 묻어 버리지만, 이야기치료사는 그 7분을 새 이야기의 씨앗으로 키웁니다. ‘그 7분 동안 너의 어떤 것이 살아 있었니? 그것을 무엇이라 부를까?’

치료적 편지와 외부 증인

David Epston의 시그니처는 **회기 사이 치료적 편지(therapeutic letters)**입니다. 회기에서 나온 외재화 어법·반짝이는 순간을 편지로 요약해 내담자에게 보냅니다. Epston은 ‘잘 쓴 편지 한 통이 회기 4~5개의 효과를 낸다’고 말했습니다. 편지가 ‘재저작된 자기’를 문서로 남기기 때문입니다.

White는 또 **외부 증인 집단(outsider witnessing group)·정의 예식(definitional ceremony)**을 도입했습니다. 비슷한 경험을 한 이들이 ‘내가 들은 것 중 무엇이 내 마음에 닿았나’를 말해 주는 자리. 이를 White는 ‘재구성원화(re-membering)’라 불렀습니다 — 자기 정체성의 ‘회원’을 다시 모으는 일.

근거의 정직한 위치

CBT가 수백 건 RCT의 메타분석으로 1차 치료 권고를 받는 데 비해, 이야기치료의 RCT 근거는 현저히 적습니다. Vromans와 Schweitzer의 2011년 Psychotherapy Research 연구는 우울·외상에 대한 이야기치료의 소규모 RCT를 검토했고, ‘예비적 지지(preliminary support)’ 수준의 효과를 보고했습니다. Beaudoin 2005는 아동 대상 효과를 정리했습니다.

그렇지만 ‘근거가 적다’가 ‘효과가 없다’는 아닙니다. 이야기치료는 두 영역에서 특히 강합니다.

첫째, 가족치료와 부부치료. 가족 시스템에서 ‘문제 있는 그 아이’를 외재화로 풀어주면 가족 전체의 위치가 재편성됩니다.

둘째, 원주민·이주민·소수자 정신건강. Dulwich Centre는 호주 애버리지널 공동체와 30년 협업했고, 식민화·세대 간 외상의 ‘이야기’를 외재화하는 작업이 ‘병리화’보다 윤리적·정치적으로 적합하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한국으로 건너온 이야기

한국 이야기치료의 출발점은 고미영 교수의 2004년 이야기치료의 이해와 적용입니다. 이후 한국가족치료학회·여성가족부 가족상담 사업이 이야기치료를 표준 도구 중 하나로 흡수했고, 학교 상담·청소년 상담에 보급됐습니다.

특히 다문화·이주민 가족 상담에서 이재림(2012) 등은 ‘좋은 며느리’ ‘열심한 직장인’ 같은 한국 사회의 지배 서사를 해체하는 작업이 베트남·필리핀계 결혼이주여성에게 회복 자원이 된다고 보고했습니다. 전통과 근대 사이, 세대와 젠더의 전환 사이에서 ‘내 이야기를 다시 쓸 자유’가 필요한 한국적 맥락 — 이야기치료의 사상적 결이 잘 맞는 지점입니다.

주의할 점도 있습니다. 한국 임상 현장에는 자격 미보유 ‘이야기치료사’가 적지 않습니다. 한국가족치료학회·한국상담학회 등 공인 학회의 슈퍼비전을 거친 임상가를 찾는 것이 안전합니다. 또 중등도 이상의 우울·외상·정신증에는 약물·CBT·EMDR 등 1차 근거 치료와 병행이 권장됩니다.

마치며 — ‘너의 이야기’는 한 줄이 아니다

이야기치료가 약속하는 건 ‘문제의 즉각적 소거’가 아닙니다. 그것은 ‘얇아진 자기 묘사를 두껍게 되찾는 일’입니다. ‘나는 우울한 사람’이라는 한 줄이, ‘우울과 12년 싸우면서도 화요일 오후엔 친구 전화에 웃은, 두 아이의 어머니이자 도서관 자원봉사자인 사람’으로 두꺼워질 때 — 그 두께가 곧 회복 자원입니다.

오늘 한 줄을 시도해 보세요. ‘나는 게으르다’ 대신, ‘그 미루기가 오늘 나에게 무엇을 시켰는가’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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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 묻는 질문

‘문제는 문제다’라며 떼어내면, 자기 책임도 안 지는 것 아닌가요?

오해 1순위입니다. 외재화는 ‘책임 회피’가 아니라 ‘책임을 질 수 있는 위치 회복’입니다. 자기 자신이 ‘우울 그 자체’라면 우울 앞에서 할 수 있는 게 없지만, ‘우울과 관계 맺은 사람’이라면 ‘오늘 우울이 나에게 무엇을 시키려 하는가, 나는 어떻게 응할 것인가’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특히 폭력·학대 가해 사례에서 White 본인은 ‘가해 행위에 대한 책임은 외재화로 약화돼선 안 된다’고 분명히 했습니다. 외재화는 수치심을 풀어 책임을 가능하게 합니다.

CBT(인지행동치료)랑 어떻게 다른가요?

변화 이론이 다릅니다. CBT는 ‘왜곡된 인지 → 합리적 인지로 교정’이 핵심 — 측정 가능한 증상 변화에 강하고 RCT 근거가 압도적입니다(우울·불안 1차 치료). 이야기치료는 ‘얇아진 자기 이야기 → 두꺼운 이야기로 재구성’이 핵심 — 정체성·관계·맥락에 강하고 RCT는 적지만 가족치료·소수자 정신건강에서 채택됩니다. 실무에서는 통합하는 임상가도 많습니다(예: CBT의 행동 활성화 + 외재화 어법). 중등도 이상 우울증은 CBT/약물이 1차이며 이야기치료는 보조 또는 동반 치료로 고려.

한국에서 이야기치료를 받으려면 어디로 가야 하나요?

①한국가족치료학회 인증 부부·가족치료사 또는 ②한국상담학회·한국상담심리학회 1·2급 전문가 중 이야기치료 훈련을 받은 임상가를 추천합니다. 공공 자원으로는 여성가족부 산하 건강가정지원센터, 다문화가족지원센터에서 가족 상담 형태로 제공되며, 일부 학교상담실(Wee센터)·청소년상담복지센터도 이야기치료 기법을 활용합니다. 사설 상담은 임상가의 ‘이야기치료 워크숍 이수·슈퍼비전 시간’을 확인하세요.

어린 자녀(초등학생)에게도 적용할 수 있나요?

예, 오히려 잘 맞는 경우가 많습니다. Epston은 어린이가 캐릭터·이야기·외재화에 자연스러운 적성을 보인다고 자주 언급했습니다. ‘똥파이트(Sneaky Poo)’는 Epston의 유명 사례 — 변비·유분증 아동이 ‘똥쟁이가 너를 속이려 들 때 너는 어떻게 한팀이 돼 이겼는가’를 이야기하며 회복했습니다. 캐나다의 Beaudoin(2005) 등은 ‘분노 괴물’ ‘걱정 벌레’ 같은 외재화로 ADHD·불안 아동에 적용되는 형태를 정리했습니다. 한국 학교상담·놀이치료에서 그림·인형을 활용하는 변형이 보급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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